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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꼴리의 검은 마술(7)

카라스톤 2021. 1. 31. 21:55

<7강 죽어 있는 삶인가, 살아있는 죽음인가>

 

멜랑꼴리의 ‘No’

대개의 경우 상대에게 ‘No’라고 거절하면, 그다음엔 상대의 눈치를 보는 것이 보통이다. ‘No’라는 말이 타자의 욕망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상대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변증법에서의 ‘No’는 그다음 단계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 자신을 받아들여 줄 수 있는 타자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6강에서 언급된 장난감 가게에서 ‘No’라고 말하는 아이를 기억해 보자. 어머니가 대상들을 아이에게 들이댈수록 아이는 ‘No’라고 말한다. 아이가 바라는 것은 어머니가 들이대는 어떤 대상들이 아니라 어머니 자신에게 있는 무엇이다. 만일 어머니가 대상들을 들이대다가 회수하거나, 어머니 자신이 아이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면, 아이는 그 순간부터 반응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는 ‘No’를 철회하거나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어머니의 반응에 의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경증자의 변증법이다.

멜랑꼴리 환자들의 부정은 변증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부정만 계속될 뿐이고 그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없다. 그들에겐 끊임없는 ‘No’만 있을 뿐, 타자가 그 ‘No’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는 ‘No’, 무조건적인 ‘No’. 어떤 불행이 닥쳤을 때 그다음 장이 없다.

 

현실감의 상실

멜랑꼴리 환자들에게는 리비도의 출혈만 있고 보상해 주는 과정이 없다. 육체로부터 주이상스를 계속해서 퍼내는 작업만 있고 다시 주워 담는 작업이 없다. 정상인의 경우에는, 출혈이 있으면 이쪽에 비워진 것을 다른 쪽에 있는 것으로 채운다. 이 수준에서 작동하는 것은 일종의 리비도의 양의 문제다. 빠진 리비도를 대상들로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충동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일이라면, 이것을 어떤 한정된 대상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부분, 새어나가는 부분, 잘려나가는 부분을 어떤 한정된 대상, 결정된 대상으로 잘 썰어서 규격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욕망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그렇게 규격화된 대상이 바로 남근이라고 불리는 시니피앙이다. 남근은 해부학적인 기관으로서의 페니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격화된 대상을 가리키는 하나의 시니피앙일 뿐이다. 보통의 경우에 충동의 만족은 이렇게 욕망의 차원을 경유해서 만족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멜랑꼴리에서는 이런 식으로 충동이 욕망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일단 멜랑꼴리는 거세가 작동하지 않는다. 거세가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주이상스의 과잉이 발생한다. 폐제된 거세가 실재의 차원으로 돌아오면서 그것을 비워 내고 잘라 내는 부정의 메커니즘이 변증법적이지 않고 무한반복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멜랑꼴리에서는 충동이 환상을 경유하지 않고 만족이 이루어진다. 환상을 경유하지 않기 때문에 충동의 만족은 제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다. 충동이 표상의 체계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만족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충동의 대상과 충동 사이에 표상이라는 범퍼가 끼지 않는다.

표상은 만족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 만족을 완화된 형태로 순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충동의 요구를 낮추어 주는 것이다. 만약 표상이라는 범퍼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충동의 요구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 육체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변화들이나 쾌락에도 매우 민감해지고 그것에 의해 압도될 수밖에 없다. 특히 충동의 대상들에 매우 민감해지기 때문에 현실감을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 멜랑꼴리의 특징일 뿐 아니라, 정신병 전반의 특징이다. 모든 정신병에는 바로 이런 식으로 현실감의 상실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물들이 생경해지기 시작한다. 현실이 상징적인 질서에 의해 구성된다면, 그러한 구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그동안 현실에서 눈 감고 있던 것들이 생생해지고 생경해진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실재라는 단어가 지닌 또 다른 의미다.

 

존재의 치명적인 비현실감에서 불멸의 망상으로

내가 여기에 있는데, 그것이 매우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비현실적이란 내가 여기에 있음이 너무나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나의 존재 자체가 엄청난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삶은 오히려 삶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갖는다. 살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치명적이 된다.

멜랑꼴리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멜랑꼴리 환자들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보통 사람과 다르게 느끼듯이 시간에 대한 감각 역시 다르다. 이 부분은 앞서 부정이 변증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멜랑꼴리 환자에게, 시간은 어떤 한 순간에 멈춰서 그것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지 않는 개념이다. 오로지 현재만이 지속되는 시간이다. 이러한 느낌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가? 죽음이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흘러야 죽을 수 있을 텐데, 멜랑꼴리 환자에겐 시간이 멈춰져 있다.

영원함, 불멸함의 느낌, 정신의학자 꼬다르는 이것을 불멸의 망상이라 불렀다. 멜랑꼴리가 극단적이 될 경우에 나타나는 망상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느낌은 과대망상증이나 조증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불멸의 망상과 과대망상증 및 조증은 어떻게 다를까? 멜랑꼴리에서의 불멸의 느낌은 일종의 한계처럼 작동한다.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 없는 존재.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존재. 지금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 부정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반복되듯, 죽어가고 있지만 죽음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멜랑꼴리 환자가 두 개의 죽음 사이에 걸려 있는 살아 있는 시체라는 말은, 이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살아있는 시체란 사물과 동일시된 멜랑꼴리 환자 자신의 자아를 의미한다. ‘사물과의 동일시란 무엇일까? 일단 동일시하는 대상 자체가 라깡의 용어로 실재적인 차원, 표상될 수 없는 것의 차원에 자리 잡고 있다. 이미지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과 동일시를 하는 것이다. ‘사물이란 나의 충동이 겨냥하지만 욕망의 환영이 떨어져 나간 대상, 오히려 공포스럽고 흉측한 대상이다. 멜랑꼴리가 동일시하고 있는 사물은 바로 그런 대상이다.

 

대상의 찌꺼기

사실 충동이 겨냥하는 대상은 얼마나 흉측한 대상인가? 구강충동의 결과물은 무엇일까?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먹던 것을 뱉어 보면 알 수 있다. 형체도 불분명하고 온갖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 오물이나 다름없다. 사실 방금 전까지 접시에 올라 있던 것은 매우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환상 속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을 빨고 부수고 절단해서 만들어 낸 것들은 매우 더럽고 흉측한 것들이다. 환상의 결과가 아름다운 대상이라면 충동의 결과는 찌꺼기.

항문충동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항문충동이 겨냥하는 대상은 애초부터 똥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똥인 것이다. 그것이 남근을 대체하게 될 때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환상 속에서 똥을 남근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환상이 깨지는 순간 그것은 그저 더럽고 흉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멜랑꼴리 환자가 동일시하는 사물, 그것은 바로 더 이상 욕망의 원인으로 작동하지 않는 대상, 그러니까 찌꺼기, 오물로서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멜랑꼴리 환자에게는 자신은 쓰레기라는 자기비하의 망상이 뒤따른다.

 

사물과의 동일시

내사의 경우에는 대상이 하나의 부분처럼 작동하고, ‘합체의 경우엔 대상이 하나의 전체’, 쪼개질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작동한다. 사실 이와 같이 부분인가 전체인가라는 문제를 위상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자면, ‘내사는 상징적인 것이고 합체는 실재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사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동일시이고, ‘합체는 실재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동일시인 것이다.

전자는 나의 부분이 걸려 있기 때문에 내가 그대로 남아서 대상을 대상으로 취할 수 있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나의 전체가 걸려 있기 때문에 동일시를 하게 되면 내가 대상에 압도된다’. 내가 대상에 흡수되어 버린다는 의미다. 결국, 소를 잡아먹게 되면 나는 소가 되며 소의 그림자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가 대상리비도 투자와 연동되어 있는 동일시라면, 후자는 나르시시즘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동일시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남긴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에서 대상의 위치에 대한 문제다. 프로이트는, 대상에서 리비도가 완전히 철회되어 자아에 투자되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 다시 말해 정신병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에선 대상이 없다는 뜻이 되나. 프로이트의 주장대로라면,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이란 결국 대상도 없고 타자도 없고, 리비도가 세계로부터 철회되어 자아로 정체되어있는 상태다.

그런데 사실 프로이트의 이러한 관점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으로서의 멜랑꼴리가 원초적 나르시시즘으로 퇴행햇다면, 이제는 대상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아야 하는 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에 드리워졌다는 것은 여전히 대상이 자아에게 어떤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자아가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면, 여전히 그 대상이 자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프로이트에게서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대상의 그림자 사물이라는 개념으로 풀이하면서 라깡의 관점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단순히 정신병에서는 리비도의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병에서 리비도의 대상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대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신경증자처럼 대상에 환상을 경유해서 리비도를 투자하고 그 대상을 욕망의 경제 속에서 작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없지 않은 대상

사물과의 동일시가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을 잘 표현해 주는 개념이다. 주체가 사물과 동일시해서 사물이 되어 버리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자에게는 리비도를 투자할 대상이 없다거나 자아로 모든 리비도가 철회되었다는 점이 문제가 아니라, 대상 자체의 위상이 다르고 대상과 주체의 관계 자체가 다르다는 점이 관건이다.

이러한 관점의 이동 이면에는 어떤 테제가 전제되어 있을까? 바로 프로이트가 가정한 것과 같은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이란 없다는 주장이다. 대상과 떨어져 홀로 사막에 존재하는 선인장 같은 주체는 없다. 늘 어떤 식으로든 주체는 대상과 연동되어 있으며, 정신병에서는 그러한 대상의 위상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 라깡의 주장이다. 이것은 라깡뿐 아니라 프로이트 이후 이른바 대상관게이론 학파에서도 주장하는 바다.

 

멜랑꼴리의 타자

정신병에서는 대상이 없는 게 아니라 대상 자체의 위상이 다르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 자체가 다르다는 문제는 또 무엇과 연관되어 있을까? 프로이트가 말했듯 과연 정신병에서는 전이가 불가능 것인가 하는 문제다.

프로이트는 원초적인 나르시시즘과 대상리비도 투자 사이의 절대적인 이분법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정신병에서 전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상이나 타자의 자리가 유지되는 만큼 당연히 정신병에서도 전이가 없지 않다. 그런데 전이의 양상 자체가 다를 수 있다. 마치 동일시의 양상 자체가 다르듯이 전이의 양상 역시 다른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적인 퇴행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정신병자에겐 자아 그 자체가 대상이 되어버린 이상, 사물과의 동일시는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대상에 대한 투자가 지속됨을 뜻한다.

다만 여기선 전혀 다른 방식의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환상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방식으로 리비도가 대상에 투자되고 있다. 대상에 리비도를 투자하면 할수록, 대상은 욕망의 경제로 들어오지 못하는 쓰레기처럼 되고, 또 그 대상과 동일시하는 자아 역시 쓰레기처럼 된다. 이는, 리비도의 투자가 상징적인 경제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채 이루어질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 중 하나다.

 

멜랑꼴리적 초자아

위의 문제와 연동해서 또 한가지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바로 멜랑꼴리에서의 초자아에 대한 문제다.

초자아는 어떤 과정에 의해 만들어질까? 프로이트는 초자아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잔여물이라고 생각했다. 초자아는 아버지와의 동일시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면서 발생한다. 쉽게 말하자면, 초자아가 갖고 있는 권위와 위엄은 바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부모의 흔적이 바로 초자아다.

프로이트의 테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초자아는 오이디푸스의 후계자, 오이디푸스가 남긴 유산이다. 프로이트가 이런 테제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신경증 환자들을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경증 환자의 분석 경험을 보면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신경증 환자는 이미 오이디푸스적인 단계를 거친 사람들이다. 라깡의 용어로 하자면, 아버지의 이름을 긍정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이디푸스를 거치지 않은 사람들, 아버지의 이름을 긍정하지 않은 사람들, 즉 정신병자들에게는 초자아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법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되면, 초자아의 압력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병에는 초자아가 없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신경증보다 더 강력한 초자아가 존재한다. 정신병의 초자아는 훨씬 더 가혹하다. 법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 않을수록 초자아는 오히려 더욱더 잔혹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초자아와 거세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비롯도는 것일까? 라깡의 생각으로는, 초자아의 상관항은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처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니다. 초자아의 상관항은 바로 거세. 물론 이때의 거세는 아버지가 아이에게 가하는 위협으로서의 거세가 아니다. 앞서 말한 원초적인 거세,  주이상스에 대한 거세를 가리킨다.

주이상스에 대한 거세.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떄문에 발생하는 주이상스의 상실이 있다. 육체를 빈 깡통으로 만드는 대신에 그것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을 밖에서 찾는데, 그러한 대상 중 하나가 바로 초자아다. 초자아의 동력은 바로 이렇게 비워진 주이상스에 의해 발생한다. 스스로 억압하면 할수록, 초자아는 더 막대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초자아의 역설이다. , 주이상스를 희생하는 만큼 초자아는 더욱 강력해지며, 더 많이 채찍질하고 더 많이 비판하게 된다.

라깡은 거세 콤플렉스, 즉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 수 있다는 거세의 환상은 오히려 초자아를 여과하는 신경증적인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라깡의 관점으로 보면, 거세 콤플렉스가 초자아가 발생시키는 불안감을 완화시키는 범퍼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완료되지 않은 거세와 비대한 초자아

멜랑꼴리에서는 거세가 폐제되어 있다. , 거세가 완료되지 않았다. 그래서 멜랑꼴리에게는 한편으로 주이상스의 과잉이 발생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주이상스를 비워 내기 위한 거세가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폐제된 거세가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자아가 거세의 상관항인 한, 초자아의 몫이 점점 무한대로 커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결국 멜랑꼴리에서는 그렇게 팽창된 초자아에 의해 자아가 완전히 깔아뭉개지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압사당하는 것을 피하기 우해 멜랑꼴리는 압사당하기 전에 먼저 몸을 피해 버린다.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초자아의 입을 막아버린다.

이러한 관점은 프로이트의 관점과 비슷한 듯하지만 사실 전혀 다른 관점이다. 프로이트에게 멜랑꼴리 환자으 자살은 초자아의 비난이 낳은 점진적인 결과 중 하나다. 생각과 행위 사이에 어떤 불연속성이 상정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멜랑꼴리 환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를 한 것은 그 환자가 평소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 뒤에 어떤 생각과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라깡은 오히려 행위와 생각이 다른 차원에 있음을 강조한다. 행위란 무엇인가?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생각이 멈추는 지점에 행위가 있다. 진정한 행위란 그렇다. 행위는 생각을 종료하고 닫아 버리면서 다른 차원으로 이행하도록 만든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행위를 하지 못한다. 생각은 오히려 행위를 연기한다.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행위는 계속해서 연기된다. 그러다가 행위가 이루어지는 시점은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는 순간이다. 생각하지 않을수록 행위는 더 쉬워진다. 행위화란 나는 생각한다에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로의 이행을 전제로 한다. 생각과 행위 사이엔 일종의 불연속이 있다. 그뿐 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자살은 주체에서 대상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인간은 어떤 이미지에 싸여 있는 채로만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보고 싶어하는 어떤 모습이 있다. 그것은 또한 다름 사람에게도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같이 세수를 하고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화장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꿈꾸는 어떤 이미지 속에서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은 상상적인 차원에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치 독립적인 존재처럼, 하나의 주체처럼 생각하는 것은 이른바 상상계 속에서다.

앞서 우리는 주이상스의 과잉, 또는 살아 있음의 과잉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내가 나의 육체를 더 이상 하나의 소유물로서, 마치 내가 육체의 주인인 양 행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를 가 아니라 그것으로 만들어 버림을 의미한다. 주이상스의 과잉, 살이 있음의 과잉은 나의 상상적인 이미지, 나르시시즘적인 이미지를 벗겨 버린다. 나의 상상적인 이미지를 벗기고 나를 그것으로 추락시킨다.

 

사물을 겨냥하기

그렇다면 멜랑꼴리에서의 행위화란 무엇인가? 바로 이러한 나르시시즘적인 이미지 저 너머에 있는 그것‘,  사물을 겨냥하는 행위다. 멜랑꼴리의 행위화는 이미지 저 너머에 있는 그것‘, 이미지 저 너머에 있는 존재‘, 다시 말해 이미지 저 너머에 있는 사물을 겨냥한다.

보통 사람의 일반적인 행위는 그렇지 않다. 통상의 행위라면 이미지 앞에서 멈춘다. 우리 자신의 이미지,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 우리가 좋아하는 이미지가 일종의 한계로 작동한다. 행위를 하다가도 내 이미지가 망가질 것 같으면 우리는 행위를 멈추게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존재를 겨냥하는 것일까. 존재가 과잉으로서 그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로서의 존재가 그를 압도하기 때문에 그의 행위가 그것을 겨냥한다. 바로 그 부분을 도려내기 위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런 의미에서 멜랑꼴리의 자살은 일종의 자기절단에 가깝다. 이미지 너머의 그것을 도려내는 것. 이 역시 일종의 분리라 할 수 있다. 자기 자신과의 분리. 이러한 분리는 멜랑꼴리의 고유한 분리다.

물론 멜랑꼴리 환자만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 신경증자 역시 마찬가지로 자살한다. 하지만 신경증자에게 자살이라는 행위는 자기절단이 아니다. 신경증자의 자살은 타자의 욕망과 연동되어 있다. 그것은 타자와의 접속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대부분의 신경증자의 자살에는 타자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

반면 멜랑꼴리에서의 자살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존재의 과잉을 도려내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메시지가 수반되지 않는다. 그들의 자살은 의미가 담긴 메시지가 아니라 그저 행위일 뿐이다. 행위는 메시지를 거부하며 그러한 메시지의 수신자인 타자를 거부한다. 따라서 이들은 때로 전혀 예견치 못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자살을 한다.

 

멜랑꼴리와 편집증

멜랑꼴리와 편집증은 똑같이 정신병에 속하기 때문에 주이상스의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출발점은 같다. 부권적인 은유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나르시시즘적인 퇴행이 일어나는데, 이 경우에 그러한 주이상스를 어디에 귀속시킬 것인지의 문제에는 차이가 있다.

멜랑꼴리에서는 그러한 주이상스를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킨다. 그들은 주이상스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 사물과의 동일시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멜랑꼴리 환자는 모든 과오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자기 자신을 놓는다. 자기 자신이 절대악이 되는 것이다.

반면, 편집증은 그러한 주이상스에 타자의 형상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편집증에서는 주이상스를 타자에게 할당한다. 절대악을 자신이 아니라 타자에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편집증자는 스스로를 타자의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기 자신을 주이상스의 대상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서 타자가 나를 착취하고 쾌락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망상이 있다. 박해망상이라든가 피해망상, 혹은 에로토마니아적인 망상이 바로 이런 유의 망상들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그것은 타자 때문이지 자신 때문은 아니다. 자신을 오로지 순진한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망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는 그 결과로, 타자가 자신을 박해할까 봐 두려워하다가 타자를 살해하거나 공격하는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편집증자들의 행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