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
<서론>
2019년 3월, 고등학생들이 대학입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연방 검찰은 깜짝 놀랄 발표를 했다. 33명의 부유한 학부모들이 예일, 스탠포드, 조지타운, 서던캘리포니아 등의 명문대에 자녀를 집어넣기 위해 교묘히 설계된 입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 음모에 중심에는 윌리엄 싱어라는 악덕 입시상담가가 있었다. 그는 SAT, ACT 등의 표준 시험 감독관들에게 돈을 찔러 주고 해당 학생들의 답안지를 조작해 성적을 부풀리도록 했다. 또한 운동부 감독들에게도 돈을 써서 운동을 아예 할 줄 모르는 학생조차 특기생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입시 부정 스캔들은 대중의 한결같은 분노를 일으켰다. 이러한 분노는 단지 특권층 부모들이 불법적 수단으로 자기 자녀들을 명문대에 입학시켰다는 데 따른 분노보다 더한 무언가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이 스캔들을 보다 널리 퍼져 있는 부정의가 불거져 나온 꼬투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대학 입학 과정에 부와 특권이 끼치는 영향력은 심지어 부정이 없는 경우에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입시 부정 스캔들을 일반적 입시 과정에서의 일탈로 보는 사람들과 이미 대학 입시에 만연해 있던 현상의 극단적 예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들의 추론에는 공통된 전제가 있다. 능력과 재능으로 대입이 이뤄져야지, 학생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다른 요인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대입은 실력에 따라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노력한 사람은 그에 따르는 헤택을 누를 자격을 갖는다고도 보고 있다.
이 견해가 옳다면, 능력주의의 문제는 원칙 자체보다 그 원칙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를 놓고 이뤄진다. 가령 보수주의자들은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능력주의적 제도에 역행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우대정책이 계속되고 있는 불공정을 시정하는 방법이며, 참된 능력주의는 특권층과 취약계층 사이의 출발선을 고르게 하는 조치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논쟁은 능력주의의 문제가 더 뿌리 깊은 것일 수 있음을 돌아보지 않는다. 명문대 입시가 과연 어쩌다가 이토록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어, 연방수사국이 이 사건을 캐내는 데 자원을 투입하고, 관련 뉴스가 헤드라인을 도배하는 이슈가 되었던 것일까?
입시 문제에 사회가 목을 메는 현상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점점 불평등이 늘어난 데서 기원한다. 누가 어디에 발을 들여놓느냐에 의해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 결정되는 세상이다. 학사 학위 소지자와 비소지자 사이의 소득 격차가 벌어지면서 대학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경제적 불안이 전부는 아니다. 싱어의 고객들은 자녀가 사회적 하향선을 타지 않도록 막는 것 말고도, 또 다른 목적에서 지갑을 열었다. 자녀가 명문대 간판을 달도록 함으로써 그들은 능력주의의 광채를 두드려고 한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입시 부정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선물하려던 것이었다.
<1. 승자와 패자>
바야흐로 민주주의 위기의 시대다. 이러한 위기는 외국이 혐오증이 점점 심해지고, 민주주의 규범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인물들에 대한 지지 역시 높아지는 데서 느낄 수 있다. 일부는 포퓰리즘적 민족주의 준동을 단지 이민과 다문화주의에 맞선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의 반발로 치부한다. 다른 일부는 이를 주로 경제 문제의 일환으로 본다. 글로벌 무역과 신기술이 빚어낸 일자리 감소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진단 모두 얼마간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포퓰리즘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푸폴류즘적 저항을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든, 무지에서 나온 것으로 보든 노동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많은 이들을 무력하고 왜소하게 느끼도록 만든 집권 엘리트의 책임은 면제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노동자의 사회적, 문화적 지위가 꾸준히 낮아진 것은 피할 수 없는 조류 탓이 아니었다.
사회적 상승 찬가는 이제 속빈 강정이 되었다. 오늘날 경제 상황상 사회적 상승은 결코 쉽지 않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미국인은 대개 가난한 성인이 된다. 소득 하위 5분위 가정 출신자는 스무 명 가운데 한 명만 상위 5분위에 이르렀고, 대부분은 중산층에도 이르지 못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은 미국보다 캐나다, 독일, 덴마크, 그 밖의 유럽 국가에서 더 많다. 이는 불평등에 대해 미국이 오랫동안 변명해온 계층 이동 가능성이라는 말과 들어맞지 않는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을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이런 점에서 굴욕의 정치는 부정의의 정치와 다르다. 그것은 포퓰리즘의 반격에 기름을 붓는 분노와 울분을 언제든 일으킬 잠재력이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또한 정부 영역에서는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격증이 있거나 전문직업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명예는 높아지고, 대부분의 노동자는 그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추락하여 그들의 사회적 기여 또한 과소평가되는 상황에 부딪친다.
시장 주도적 세게화는 40년 동안 계속되며 정치 담론의 장을 공동화했고, 보통 시민들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포퓰리즘의 반격을 촉발했다. 그 반격이란 텅 비어버린 공론장에 무자비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민족주의를 채워 넣으려는 움직임이다.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는 생각은 몇 가지 이유에서 매력적이다. 그 중 두 개는 능력 우선 패용에서 바람직하다고 본 효율성과 공정성을 원칙화한 것이다. 노력과 선도적 시도, 재능에 후하게 보상하느 경제체제는 기여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보상하는 체제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등 보상하는 체제보다 더 생산적일 것이다. 오직 각자의 능력대로 보상하는 시스템은 실제 성취만으로 사람을 구별할 뿐이므로 공정성을 갖는다.
이는 또한 야망이라는 차원에서도 매력적이다. 이는 우리 운명이 우리 손 안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성공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우리는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라 운명의 주인이다. 이 약속은 견디기 힘든 부담을 준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 큰 무게를 싣는다.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아우크스티누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행동은 능력주의를 다시 불러들였다. 신앙과 종교 계율을 잘 지키고 선행을 한다 해서 신의 총애를 받거나 신에게 점수를 딸 수는 없다는 믿음을 오래 유지하기란 어렵다. 신앙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되고 교회의 복잡한 예식들로 전달, 강화될 때, 감사와 은총의 신학은 피치 못하게 자부심과 자기 구제의 신학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칼뱅의 예정설과 구원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통해 반드시 현시된다는 생각과 결합됨으로써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이웃들의 죄에 대해서도 일정한 태도를 지닌다. 우리 모두가 약한 자들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동정적 이해가 아니다. 신의 적으로써 영원히 정죄 받은 자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다.
우기가 자유로운 능력의 소유자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일면일 뿐이다.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다는 신념이 공통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다. 이런 승리주의적 측면으로부터 승자들 사이의 오만, 패자들 사이의 굴욕이 나온다.
저마다 가질 만한 것을 갖는다는 섭리론적 관념은 지금의 공적 담론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목소리는 두 종류다. 하나는 오만한 목소리, 또 하나는 징벌의 목소리다. 두 가지 다 우리 스스로 운명을 책임질 것을 강조하며, 성공도 실패도 자기 탓이라고 본다.
최근 수십 년동안 미국 기독교는 번영의 복음이라 불리는 떠들썩한 신종 섭리론을 내놓았다. 번영 복음주의 역사가인 케이트 바울러는 그 가르침이 다음 구절로 집약된다고 한다. 나는 축복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축복의 증거는 부유하고 건강하다는 사실이다.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은 능력주의적 생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운이나 은총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우리 운명을 책임진다고 여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허리케인이든 쓰나미든 나쁜 건강이든 희생자들이 겪는 재난을 자업자득이라고 여기고 희생자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선량하니까 위대하다는 섭리론에 내포된 능력주의적 색채는 사회적 단결, 개인의 책임, 복지국가 등에 대한 국내적 논쟁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진보파들은 복지국가에 대한 보수적인 비판을 점점 더 많이 수용해갔다. 그 가운데는 개인의 책임을 더욱 강조한다는 개념도 있었다.
능력과 은총 사이의 균형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청교도들에서부터 번영 복음 전도자들가지, 성취의 윤리학은 거의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유혹이었고 언제나 보다 겸손한 희망과 기도의 윤리학, 수혜와 감사의 윤리학을 압도했다. 능력주의는 우리의 은총을 추동하거나 그 자체의 이미지로 개조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 은총을 받았다는 것이다.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우리 삶에 대해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크면 클수록 우리 삶의 결과에 대해 찬양하거나 비하할 소지 또한 커진다.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능력과 자격 담론이 사회적 상승 담론과 짝을 이루었다. 복지국가에 대한 레이건, 대처식 비판은 누구나 자신의 복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따라서 공동체는 단지 자기 책임이라 할 수 없는 불운에 대해서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능력주의의 폭정은 사회적 상승의 담론 그 이상의 것들을 포괄한다. 첫째,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는 메시지가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 꺾는다. 두 번째, 대학의 학위가 좋은 일자리를 얻고 품격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주장은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트린다. 셋째,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그러나 노력과 근성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적 믿음은 더 이상 현실과 맞지 않는다. 미국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상류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사실 대부분이 중산층조차 되지 못한다. 사회적 상승에 대한 연구에선 보통 소득 수준을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가장 하층에서 태어난 사람은 겨우 4~7퍼센트만 최상위층에 도달한다. 그리고 삼분의 일 정도만이 중간층이나 그 이상까지 간다. 정확한 숫자는 연구 결과마다 다르지만, 아메리카 드림에서 찬미 받는 자수성가한 부자의 삶을 실현하는 미국인은 매우 드물다.
부나 가난의 대물림 현상은 독일, 스페인,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보다 미국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부모의 부가 자녀에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일이 거의 절반에 이르지만,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에서는 그 절반 정도일 뿐이다. 밝혀진 대로라면 덴마크와 캐나다의 청소년는 미국 청소년에 비해 간나한 집에 태어났다가 부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런 기준에서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이 아니라 코펜하겐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볼 일이다.
사회적 상승의 담론이 야심적이며 아직 달성되지 못한 저 너머를 약속한다고는 하지만, 결국에는 이미 이루어진 현실만을 축복하게 된다. 희망은 긍정하되 현실에서 그 희망을 이룬 자들에게 한정된 축복을 보내는 것이다.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세계화 시대는 노동계급에게 큰 폭의 불평등 확대를,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퍼센트는 대부분의 이익을 챙겼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당들은 이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 정책을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
글로벌 경제는 마치 자연법칙에 따르듯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주된 정치적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재편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에 적응하느냐였다.
해답은 이랬다. 노동자의 학력 수준을 높여 그들이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경쟁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한다. 기회의 평등이 기본적인 도덕적, 정치적 프로젝트 과제였다면 고학력을 이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정책의 제1목표였다.
못사는 집 사람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좋다. 그러나 불평등과 수십 년 동안의 세게화로 노동자가 떠안게 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심각한 역효과를 낳는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는 것이다.
오바마는 2000년대 초에 전문직업인들의 상식이 되어 버린 이런 능력주의적 사고의 기수나 다름없었다. 언젠가부터 오바마는 최고 지위의 전문직업인들은 공정한 선별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져버렸다. 학력주의는 1990~2000년대 민주당 사람들의 정치적 표현 방식을 윤색했으며, 공적 담론에서 쓰는 용어조차 교묘하게 변형시켰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이 우세해지면서 그런 이분법적 가치 대조는 스마트하냐 우둔하냐가 대세로 자리잡았다.
능력주의의 승리에 따른 피해 중 하나로 고학력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줄어든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때 기회의 문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대학 학위는 이제 학력주의자의 특권과 능력주의의 오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오로지 교육만이 불평등의 해답이라 하는 사회적 상승 담론은 부분적으로 비난받는다. 이런 생각은 비대졸자의 사회적 기여를 폄하하며 사회의 저학력 구성원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긴다. 그리고 노동계급 전체를 대의정부에서 효과적으로 배제한다. 그 결과 정치적 반격을 겪는다.
이런 학력주의 병페와 가깝게 이어진 것이 기술관료적인 공적 담론의 왜곡이다.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문제로 여겨질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들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은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21세기 초의 많은 사회과학자들, 경영 컨설턴트, 기업 임원들처럼 오바마는 시장 메커니즘이 바람직한 결과를 내도록 하는 방법으로 인센티브제화를 받아들였다. 인센티브제화는 당파주의나 이념적 논쟁을 피하려는 오바마의 본능에 잘 들어맞는 기술관료적 개념이었다. 이는 돈 욕심을 활용해 공공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며, 따라서 정부의 강압과 자유방임적 시장 선택 사이의 적절한 중용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로 그렇게 하도록 하는 방법의 대안일 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하도록 설득하고 권유하는 방법의 대안도 된다.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실에 합의할 수만 있다면 정책에 대해 합리적 토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술관료적 시념은 정치적 설득의 메커니즘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기술관료적 입장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약점은, 그것이 겉보기로는 잡음의 여지가 없는 가치중립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규범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 이 시기, 능력주의 엘리트의 오만과 기술관료적 비전의 협소함에 대한 불평은 별 것 아닌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이 지금 이 지경까지 정치를 끌고 온 것이다. 그런 불만을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들이 잘도 써먹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