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꼴리의 검은 마술(2)
<2장 대상의 그림자에 갇히다>
우울증과 모더니티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느 시대보다도 우울이라는 정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순히 우울해할 뿐 아니라 우울하다며 불평하는 시대. 역사상 그 어떤 시대도 이토록 불평이 난무하는 시대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이상 행동이 21세기,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나타났을까? 부모의 모든 권위가 추락하고 아이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이 시대, 아이와 부모의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근접해 있는 이 시대,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쉽게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이 시대, 그 어느 때보다도 대상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이 시대에 그런 주체할 수 없는 새로운 인간이 등장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우울은 우리가 흔히 무언가를 잃어버려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려면 그만큼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즐기고 더 많이 누려야 한다. 애초부터 가져본 적이 없다면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예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때우는 것이 급급했던 시절에는 사실 우울함조차 느낄 여유가 없었다.
대상의 장례식
프로이트는 처음에 애도와 멜랑꼴리를 어떻게 비교했는가? 상실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비교해 볼 때, 결국 애도는 ‘자아의 억제’와 관련이 있고 멜랑꼴리는 ‘자존감의 추락’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자아의 억제는 대상에 대한 활동이 제한되는 것이며, 자존감의 추락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의 평가가 하락하는 것이다.
그런 후 프로이트는 경제적 프로세스라는 관점에서 애도와 멜랑꼴리를 비교한다. 애도에서의 경제적 프로세스가 ‘애도 작업’이라면, 멜랑꼴리에서의 경제적 프로세스에는 그러한 애도 작업에 상응하는 어떤 내적 작업이 있는 것일까? 바로 이것이 애도와 멜랑꼴리를 비교하는 두 번째 지점이다.
미지의 상실
의식적인 상실이란 의식이 자신의 상실감의 원인을 분명하게 특정할 수 있는 경우라면, 무의식적인 상실이란 상실감은 있지만 그것을 유발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애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하지만 멜랑꼴리에서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가 확실치 않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 슬픈데, 그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애도 작업의 결과는 자아의 억제, 즉 자아가 세계에 대한 관심을 철회하는 것이다. 물론 애도 작업이 억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과정의 결과다. 그 과정이 완료되면 더 이상 그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억제가 해제되어 세계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일상의 리듬을 되찾게 된다. 이것이 애도 작업인 반면 멜랑꼴리의 경우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자아가 슬퍼하면서 멜랑꼴리적인 억제를 한다. 멜랑꼴리적인 억제는 자기를 비난하고, 자기를 처벌하는 망상으로 귀착한다.
멜랑꼴리의 내적인 작업
만일 그렇게 가정할 수 있다면, 무엇인지 모르는 대상의 상실을 자기비난으로 바꿔 놓는 것이 바로 멜랑꼴리에서의 내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알지 못하는 대상을 잃어버렸고 자아가 자신을 비난한다면, 대상을 잃게 되었을 때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핵심은 상실에 대한 ‘책임’의 문제다. 그런데 이 정도의 반응은 애도에도 해당하는 일반적인 경우다. 멜랑꼴리에서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무언가가 멜랑꼴리의 내적인 작업의 핵심이다. 일단 멜랑꼴리 환자들이 보이는 자기비난은 매우 가혹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프로이트는 멜랑꼴리의 자기비난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자세히 설명한다. 이 부분은 멜랑꼴리 환자의 현상적인 특징으로서 멜랑꼴리를 감별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멜랑꼴리 환자가 우리에게 내보이는 자아는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다. 그는 스스로를 비난하고,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스스로가 이 사회에서 추방되고 처벌받기를 기대한다” 결국 프로이트는 멜랑꼴리 환자들의 자기비난의 심각성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열등감의 망상’.
자기비난의 망상
멜랑꼴리 환자가 지닌 증상의 출발점인 열등감의 망상은 확신을 갖는다는 데 특징이 있다. 망상을 하는 사람들은 그 망상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니 그들에게 의심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아무리 들이대 보아도 소용이 없다. 여기서는 프로이트가 열등감의 망상에 대해 제시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특징은 멜랑꼴리 환자의 자기비난은 현실적인 타당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멜랑꼴리 환자의 언어는 신경증자의 언어와 달리 분열된 언어, 속을 감춘 언어가 아니다. 신경증자의 언어가 겉과 속이 다른 언어라면, 멜랑꼴리 환자의 언어는 그 자체로 참의 가치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멜랑꼴리 환자의 자기비난은 진정한 자기 이해에 가깝다. 예컨대 신경증자가 “난 못났어요”라는 말은 그 이면에 사랑에 대한 요구를 함축한다. 반면에 멜랑꼴리 환자의 “난 못났어요”라는 말은 진짜로 자신을 비난하는 말일 뿐 상대에 대한 요구를 함축하지 않는다.
즉, 멜랑꼴리의 문제는 현실적 타당성이 아닌 심리적 정확성의 문제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자기 비난의 내용이 객관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그렇게 느끼느냐가 핵심이다.
두 번째 특징은 수치심의 부재이다. 멜랑꼴리 환자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일반적인 자기비난에는 수치심이라는 장벽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느껴도 그것을 숨기거나 드러내지 않기 마련이다. 반면 멜랑꼴리 환자의 자기비난에는 수치심이라는 장벽이 없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거나 심지어는 만족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대상 상실에서 자아 상실로
앞서 언급했다시피, 멜랑꼴리의 출발점은 ‘대상의 상실’로 보였다. 그런데 내적인 작업의 결과물, 즉 겉으로 보이는 증상은 ‘자아의 상실’과 관련된 것이었다. 무언가가 뒤바뀌어 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문제의 해답은 바로 내적인 작업의 매커니즘 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이 내적 작업에 의해 대상의 상실이 자아의 상실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는 자기비난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인간의 자아 구조, 자아 분열에 대해 언급한다. 왜냐하면 내적인 작업을 이해하려면, 자아의 분열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멜랑꼴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아의 분열이다. 자아가 자신을 비난한다면, 이러한 비난에는 주객이 있을 것이다. 누가 비난을 하는가? 바로 자아다. 누구를 비난할까? 그 또한 자아다. 다시 말해, 자아의 한 부분이 다른 한 부분을 비난하고 있다. 자아가 둘로 쪼개져서 하나는 비판하고 판단하는 기관처럼 작동하고, 또 다른 하나는 감시당하고 비판받는 대상처럼 작동한다.
자아의 분열이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인 것이라면, 멜랑꼴리에서는 그것이 병리적으로 극대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이 프로이트가 제기한 가설이다.
비난의 회귀
바로 여기에, 앞서 이야기한 모순, 즉 대상의 상실이 어떻게 자아의 상실이라는 결과를 낳는가 하는 문제의 실마리가 있다. “사실 아주 단순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그 모순점을 설명할 수 있다. 만일 어느 멜랑꼴리 환자가 내뱉는 온갖 자기비난의 말을 꾹 참고 들어보면 정말 듣기 어려운 심한 자기비난의 말이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조금만 달리 보면 그런 비난의 말이 다른 사람, 그 환자가 현재 사랑하고 있거나 아니면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혹은 그가 꼭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
프로이트의 글에 따르면 멜랑꼴리 환자의 자기비난은 원래는 자신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비난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비난이었는데, 그것이 자아에게로 되돌려진 것이다.
“저항할 힘을 지니지 못한 대상리비도 투자는 결국 사라지게 되고, 반면에 자유로운 리비도는 다른 대상을 찾는 대신 자아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자아 속에서도 그 리비도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아를 포기된 대상과 동일시하는데에만 기여할 뿐이다. 그래서 그 포기된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에 드리우게 되고 그때부터 자아는 마치 그것이 떠나 버린 대상이라도 되는 듯 어떤 특수한 기관에 의해 대상처럼 취급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상 상실은 자아 상실로 전환되고, 자아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은 자아의 비판적 활동과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 사이의 분열로 바뀌게 된다.”
저항할 힘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대상리비도 투자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다. 저항할 힘을 지니지 못한 대상리비도 투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대상을 사랑하다가 대상에게 실망하거나 대상을 미워하게 되면, 더 이상 대상리비도 투자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대상에 투자되었던 리비도는 어떻게 될까? 일반적인 경우 다른 대상을 찾아가지만, 이 경우에는 리비도가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자아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리비도가 대상이 아닌 자아 속으로 들어가면, 대상이 아닌 자아를 리비도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즘이 발생할 텐데, 이러한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멜랑꼴리에선 동일시가 발생한다. 그런데 멜랑꼴리는 대상의 상실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한 동일시가 상실된 대상과의 동일시라는 형태로 실현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멜랑꼴리에선 나르시시즘이 대상과 동일시하는 형태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 대상에 투자되었던 리비도가 철회되어 자아에게로 귀속되었는데, 그것이 자아를 사랑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대상과 동일시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대상의 그림자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멜랑꼴리에서는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에 드리워지면서 ‘자아가 쪼개진다’는 점이다. 대상과 자아의 관계가 자아와 자아이상 사이에 그대로 복사되어 있다. 자아가 대상을 비난하듯, 자아이상이 자아를 비난한다. 자아가 대상을 비난하는 관계가 자아이상과 자아 사이에서 그대로 구현되면서, 스스로를 비난하고 탓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 ‘대상과의 동일시’가 바로 멜랑꼴리에서의 내적인 작업이 거치는 경제적 프로세스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동일시는 자기비난의 망상을 낳는다. 프로이트는 내적 작업의 두 가지 핵심적인 절차에 대해 설명하는데, 하나는 멜랑꼴리의 고유한 동일시와 관련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동일시 속에서 작동하는 양가감정과 관련된 것이다.
첫째, 앞서 대상리비도 투자에서 철회되어 자아로 흘러 들어온 리비도는 동일시를 위해 사용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동일시는 사랑했던 사람과의 동일시였다. 결국 그렇다면 이 동일시의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을 부여잡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상을 포기해야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잃어버린 대상을 되찾는 한 가지 방식이다.
퇴행적 동일시
멜랑꼴리에서 동일시가 대상리비도 투자를 대체한다고 할 때,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반적인 동일시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멜랑꼴리에서의 동일시는 ‘퇴행’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는 이 퇴행을 나르시시즘적인 단계로의 퇴행이라 불렀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가 끌어들이는 이론이 바로 ‘리비도의 발달론’이다. 프로이트는 애초에 대상들을 선택해서 대상들에 리비도를 투자하기 전에, 나르시시즘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는 단계가 있다고 했다. 그런 단계 중 가장 원초적인 단계로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구강, 즉 입을 중심으로 리비도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구강기다. 최초의 리비도적인 기관이 입이기 때문이다.
구강기적 양가감정
구강기에서는 구별되지 않는 것이 많다. 가장 먼저, 대상과 주체가 구별되지 않는다. 구강기의 아이들은 무엇이든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이때 아이는 자신이 집어삼키는 것과 자기 자신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 즉, 구강기에서의 빠는 행위나 집어삼키는 행위는 동일시적인 과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동일시를 ‘합체’라고 부른다. 어원을 보면 ‘몸속에 집어넣어서 몸과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구강기는 자아와 대상이 구별되지 않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구별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대상을 좋아하는가 미워하는가’의 문제다. 애착과 파괴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강적인 행위에는 빠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아서 빨다가 깨물어서 집어삼켜 버리기도 한다. 키스를 하다가 입술을 깨무는 것처럼 대상에 대한 애착이 어떤 지점에서 대상에 대한 파괴로 넘어간다. 오로지 입이라는 기관을 통해서만 세계와 만나고 세게에 반응하는 아이에게는, 깨무는 것이야말로 애착을 표현하는 최상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뜯어먹으면서 그 대상과 하나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정신적으로 발달해서 주체와 대상이라는 구분을 확립한 상태이고, 그렇기 때문에 소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소가 내 속에 있다거나 내가 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보통의 경우 그것은 그저 하나의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정신이 미숙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리비도의 초기 발달 단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구강기에서의 유아를 놓고 보면, 먹는 행위가 곧바로 정신 속에 흔적을 남기며 그런 식의 합체가 상상이 아니라 현실처럼 느껴질 수 있다. 포식을 통한 합체는 구강기로의 퇴행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 바로 그러한 퇴행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결가 중의 하나가 바로 멜랑꼴리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여기서 프로이트가 제시하는 가설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이 대상에 대한 파괴와 같이 작동하는 것을 양가감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강기 단계로의 퇴행을 통한 동일시’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랑과 증오의 양가감정으로 인해, 대상을 증오하는 것이 곧 대상을 부여잡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을 뜻한다. 대상에 대한 증오를 사라진 대상을 부여잡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대상과 동일시를 해서, 대상이 아닌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 바로 구강기로의 퇴행에 기초한 동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