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꼴리의 검은 마술(3)
<3강 당신을 먹고 당신이 되다>
두 가지 양가감정
일반적인 애증의 관계가 두 개의 서로 다른 감정이 병존하는 경우라면, 구강기에서 대상을 빨고 물어뜯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양가감정 속에서는 사랑과 증오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즉, 우리가 이 단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아직 명료하게 분절되지 않은 사랑과 증오의 혼합체인 것이다. 요컨대 구강기는 사랑과 증오가 구분되지 않는 단계다.
우리는 양가감정이란 용어 속에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구강기의 양가감정처럼 하나가 어떤 하나와 일치하기 때문에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가능하다. 이것을 ‘일치의 양가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와 뒤섞여 있어서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을 ‘병존의 양가성’이라고 해 보자.
여기서 일치란, ‘사랑이 증오와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증오가 사랑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사랑이 증오로 표현될 순 있지만 증오가 사랑으로 표현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리비도의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애초에 대상이란 사랑의 대상을 의미한다. 양가감정은 애초의 출발점이 리비도이기 때문에 사랑이 증오로 표현될 순 있지만, 증오는 사랑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포식
구강기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구강기의 단계에서는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이 분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강기에서는 내가 삼키는 것인지 삼켜지는 것인지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유는, 삼키는 것과 삼켜지는 것이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뱀이 자기 꼬리를 집어삼킬 때가 있다. 이럴 경우, 이 뱀은 삼키는 자일까, 삼켜지는 자일까. 이것은 뱀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간 역시 자신을 삼킬 수 있다. 자가 포식. 자신을 삼키기. 구강기가 바로 이런 시적인 단계에 해당한다.
공격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공격적, 폭력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서서히 목을 죄는 것도 공격성의 한 표현이다. 특히 자신에 대한 공격성이 그런 경우다. 마치 뱀이 서서히 자신의 꼬리를 집어삼키듯이, 멜랑꼴리 환자는 서서히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다.
이것은 두 개의 상반된 축, 곧 집어삼키고 집어삼켜지는 두 개의 상반된 축이 일치하는 형상이다. 이러한 상반된 축의 일치를 혹자들, 가령 융과 같은 사람은 갈등 단계들의 종착점처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퇴행에 불과하다. 프로이트는 갈등론자다. 그는 인간의 정신 속엔 해소되지 않는 근원적인 균열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균열은 어떤 방식으로든 봉합되지 않는다. 갈등이 귀착하는 곳은 환상과 증상, 둘 중 하나일 뿐이다.
퇴행적 동일시
물론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증오하는 데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을 수도 있다. 상대가 기대를 저버린 데서 느끼는 실망감이나 배신감, 또는 상대가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증오일 수 있다. 이 경우는 두 가지 감정, 즉 사랑과 증오가 병존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라 구조적인 이유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증오할 수도 있다. 자아가 구조적으로 그렇게밖에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자아가 구강기로 퇴행하면서, 사랑과 증오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말 그대로 일치로서의 양가감정이다.
“멜랑꼴리의 경우에서는 대상과의 관계가 아주 복잡하다. 양가감정은 기질적인 것, 즉 멜랑꼴리 환자의 자아가 형성하는 모든 사랑 관계에 나타나는 요소일 수도 있고, 혹은 대상 상실의 위험을 포함한 여러 경험에서 비롯된 것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사실 멜랑꼴리는 보통 죽음과 같은 대상 상실에서 발생하는 애도와 비교해 보면, 그 발생 원인의 범위가 훨씬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을 살펴보면 양가감정의 두 가지 근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기질적인 것이다. 멜랑꼴리 환자의 자아가 지닌 어떤 구조 때문에 양가감정이 대상과 관계를 맺는 데 마치 하나의 기질처럼 토양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멜랑꼴리는 애도와 같이 대상 상실이나 대상 상실의 위험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멜랑꼴리 환자는 자아가 이미 그렇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대상과도 그런 식의 퇴행적인 관계 속에 놓일 수 있다. 애도는 상실의 대상이 명확한 반면, 멜랑꼴리는 상실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만큼 멜랑꼴리의 원인은 애도보다 훨씬 다양하다.
두 개의 동일시
지금 우리는 애도 작업에 대응하는 멜랑꼴리의 내적인 작업, 곧 멜랑꼴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작업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핵심은 동일시와 나르시시즘적인 퇴행이다. 멜랑꼴리 작업에는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멜랑꼴리 작업의 동일시는 히스테리의 동일시와 어떻게 다른가의 문제이며, 둘째, 멜랑꼴리의 자기비난은 강박신경증자의 자기비난과 어떻게 다른가의 문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멜랑꼴리의 동일시는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라 할 수 있다. 동일시는 동일시인데 나르시시즘적인 단계로 퇴행한 것을 말한다. 히스테리의 동일시는 동일시이되,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가 아니다. 멜랑꼴리에서는 대상리비도 투자가 포기된 반면에, 히스테리에서는 대상리비도 투자가 유지되고 있다.
히스테리에서 유지되고 있는 대상리비도 투자는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걸가? 히스테리에서의 대상리비도 투자는 제한적이다. 부분적이라는 의미다. 부분적인 동일시란 어떤 하나의 일부를 떼어 내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상대에게서 하나의 시니피앙을 떼어서 그것을 통해 동일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들이나 신경자극 전달에 한정된다.” 동일시가 어떤 특정한 계기, 곧 어떤 행동이나 신경(신체적인 증상)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분석한 히스테리 환자 도라의 기침을 살펴보자. 도라가 기침을 한다. 분석을 해 보니 도라의 기침이 아버지의 기침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억압해야 하는 대신, 도라는 아버지의 증상이었던 기침을 통해 아버지와 동일시한다. 이때의 동일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대신한 것이다.
물론 이런 동일시가 반드시 사랑하는 대상과의 동일시인 것만은 아니다. 미워하는 대상이어도 동일시할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어머니와의 동일시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대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증상인 기침을 떼어 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 경우에는 아버지라는 대상에 대한 리비도 투자가 포기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리비도 투자를 연장해서 동일시가 발생한 것이다. 대상으로부터 리비도가 철회되어 나르시시즘적인 단계로 퇴행하지 않는다. 이때 동일시의 특징은 ‘부분적’이라는 데 있다. 하나의 특징만을 떼어 내어 그것을 통해 동일시를 하는 것이다. 부분적인 동일시라는 것은, 동일시이되 그렇다고 해서 도라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도라와 아버지 사이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유효하다.
반면에 멜랑꼴리에서의 동일시는 대상에 대한 리비도 투자를 포기하면서 그러한 대상 대신에 자아를 리비도의 대상으로 취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경우엔 첫째, 대상리비도 투자가 포기되고, 둘째, 나르시시즘으로의 퇴행이 있는 것인데, 셋째, 결국 이러한 퇴행에 기초한 동일시는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이다. 자아가 대상을 완전히 대체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아니라 전체와 전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멜랑꼴리적 동일시
이러한 과정은 전체와 전체 사이의 문제다. 전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 대상이 자신 전체이기 때문에, 그 대상이 죽으면 나도 같이 죽는 것이다. 여기서 부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을 뿐이다. ‘전체가 안 되기 때문에, 부분이라도?’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멜랑꼴리에서 이야기하는 전체는 부분의 총합으로서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체,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전체다. 집어삼킨 대상이 전체이기 때문에, 그 대상이 죽거나 증오의 대상이 될 경우, 빠져나올 구멍이 없다.
대상에게서 하나의 시니피앙만을 떼어낼 수 있다면, 나는 꼭 같이 죽지 않아도 된다. 그 시니피앙만을 떼어서 그 부분만 같이 죽고 나머지는 살아 있는 것이다. 가령,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에는, 아들들이 아버지를 죽여서 나눠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전제적 아버지가 어머니와 누이들을 독점하자 아들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나눠 먹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나눠 먹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아버지를 죽인 후 한 사람이 아버지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면, 그 사람은 통째로 바로 그 죽은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자신이 죽인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신을 죽이는 과정이 일어날 것이다. 자아가 대상의 그림자에 의해 집어삼켜지는 멜랑꼴리적인 과정에 압도될 것이다.
하지만 부족의 신화에서는, 아들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그것을 나눠 먹는다. 한 조각씩 나눠 먹음으로써, 그 부분에 대해선 죄의식이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대상의 그림자에 압도되어 자신을 죽이는 단계에는 이르지 않는 것이다.
히스테리적 동일시
인간은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먹고 귀로도 먹고 마음으로도 먹을 수 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눈으로 상대를 집어삼키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 사람들을 조금씩 떼어먹으면서 살고 있다. 우리의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부를 떼어 내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자신이 먹은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뜯어먹고 또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죄의식)을 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적인 연대가 형성되는 방식이다.
이렇게 ‘부분’이 문제인 경우가 바로 히스테리적 동일시다. 히스테리에서는 대상에게 있는 어떤 하나의 특징을 따서 내가 그것을 통해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이 문제다. 마치 앞에서 이야기한 도라의 기침처럼 대상이 가지는 하나의 특징을 내 안에 심어 놓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을 ‘내사’라 부른다.
합체가 이루어지는 수준과 내사가 이루어지는 수준은 전혀 다른 수준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전체인가 부분인가라는 문제 이상의 문제다. 바로 이 지점이 라깡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자신을 비난하는 두 가지 방식
두 번째 문제는 ‘우울증에서의 자기비난’과 ‘강박증적인 자기비난’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말하자면 멜랑꼴리는 애도처럼 사랑하는 대상을 현실에서 잃었다는 것에 대한 반응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 이상의, 즉 애도라는 정상적인 심리 상태에서는 없는, 혹 있다 하더라도 그 정상적인 심리를 병리적인 애도로 전환시키는 어떤 결정적인 요인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그 이상의 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 이상의 뭔가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퇴행적 동일시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퇴행을 통해 동일시가 발생하지만 또한 양가감정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경우 그에 뒤따르는 그와 같은 우울증적 상태는 리비도의 퇴행적 철회가 없는 경우라도 양가감정에 따른 갈등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여기서 우울증적 상태라고 되어 있는 용어는 멜랑꼴리가 아니다. 강박증에서의 우울감을 가리키는 것이다. 강박증적인 우울감은 리비도의 퇴행적 철회가 없는 경우라도, 그러니까 나르시시즘적인 퇴행이 없이도 양가감정이 나타나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경우의 양가감정은 어떤 형태인가?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한 데서 온 죄의식에 기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죄의식을 느꼈을까?
대상에 대해 사랑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아는 대상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비난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대상이 사라졌다. 바로 거기서부터 대상이 사라진 데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 강박증자도 대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이 경우는 두 개의 감정이 하나의 대상을 동시에 겨냥하여 갈등이 일어나므로, 여기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감정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병존이라 볼 수 있다.
강박신경증에서는 사랑과 증오라는 감정이 별개의 감정으로 분리된 이후에, 그것이 병존하는 단계로 퇴행하는 것이 문제다. 만약 단순히 사랑이 증오라는 형태로 표출될 뿐이라면, 죄의식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죄의식은 내가 때린 대상이 내가 사랑하는 대상임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한 감정이다. 리비도의 발달 단계에서 사랑과 증오가 분할되긴 했지만, 이것이 함께 공존하는 단계로 퇴행을 했다.
항문의 양가성
과연 사랑과 증오가 혼동되어 있는 단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프로이트는 항문기가 그런 단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항문기는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이 막 분할되는 단계이긴 한데, 이것이 섞여 있는 단계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항문 중에서 끊고 밀어내는 부분은 능동성이나 공격성과 관련되어 있고, 대변이 통과하는 부분인 점막이 있는 관은 수동성이나 성감과 관련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항문은 이러한 대립항들이 동시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병존의 양가감정이 나타나는 기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강박증에서 우울감이나 죄의식은 어떻게 발생할까? 프로이트는 강박증자가 보이는 자기비난은 자아가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인데, 이것은 원래 대상에 가해졌던 공격성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보았다.
멜랑꼴리의 양가감정이 일치의 양가감정이라면, 강박증의 양가감정은 병존의 양가감정이고, 멜랑꼴리의 퇴행이 나르시시즘적인 퇴행,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라면, 강박증은 여전히 대상리비도 투자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항문기로의 퇴행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증의 경제학
프로이트는 멜랑꼴리를 히스테리와 강박증과 비교한 다음, 마지막으로 중요한 문제를 한 가지 더 다른다. 바로 멜랑꼴리와 조증의 관계다. 멜랑꼴리가 극도의 우울감과 자기비난으로 특징지어진다면, 조증이란 과도한 기쁨, 광분, 과도한 나르시시즘이라 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멜랑꼴리가 종종 조증과 하나의 사이클을 이루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멜랑꼴리와 조증의 주기적인 교차를 프로이트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두 가지 점에서 조증이 멜랑꼴리와 짝패가 아닐까 하고 추정한다. “하나는 정신분석적 인상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전반적인 경제적 경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정신분석적인 인상. 요컨대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언뜻 보았을 때 멜랑꼴리와 조증은 무언가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멜랑꼴리와 조증은 어떤 하나의 장애물을 놓고 하나는 엎어져서 울고 있는 상태이고, 또 하나는 그 장애물을 뛰어넘어 기뻐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장애물은 무엇일까? 바로 대상의 상실을 의미한다.
둘째, 경제적 경험. 경제적 경험이란, 멜랑꼴리와 조증의 심리적 상태를 정신적 에너지의 축적과 지출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관찰되는 것들을 말한다. 멜랑꼴리의 고통, 즉 상실의 고통을 이기려면 그것을 중심으로 방어벽을 쌓아야 한다. 그 방어벽을 위한 리비도 투자를 리비도 반대투자라 부른다. 리비도 반대투자란, 리비도를 투자하되 어떤 대상을 얻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막기 위해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몸에 상처가 생기면 그 상처를 중심으로 항체들이 형성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 고통을 중심으로 표상을 쌓고 그 표상으로 고통을 막아 낸다. 그러면 그 표상을 쌓는 데 에너지가 드는데, 그러한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바로 리비도 반대투자다.
그런데 고통을 넘어섰으니 이제는 그 반대투자가 필요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리비도 반대투자가 무너지면서 걸신들린 사람처럼 해방감이 오고 그것이 바로 조증의 상태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조증이 멜랑꼴리에서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발생하는 에너지의 방출과 관련이 있다면, 왜 애도에서는 애도 작업이 완수된 후 그런 식의 해방감이 발생하지 않을까?
애도의 경제학
“여기서 우리는 그와 같은 단절 작업이 너무 느리게, 점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 작업이 끝날 때쯤이면, 단절에 필요한 에너지 또한 모두 소진되는 것으로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상에서 리비도를 떼어 놓기 위해선 노동이 필요하다. 그러한 노동이 애도 작업이라면, 그런 노동을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노동을 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도의 경우에는 그 노동이 너무나 느리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노동이 끝날 때쯤이면 그것을 위해 투자했던 에너지들이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프로이트는 리비도 반대투자를 위해 사용했던 에너지가 그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분산되어 빠져나가 버린 게 아닌가 자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