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감정의 민간요법에서 우울의 정신분석으로>
리비도 투자의 공백
애도에서 핵심은 잃어버린 대상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떼어 내는 것이다. 애도의 고통은 대상 상실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 상실로 인해 더 이상 리비도를 투자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문제는, 대상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대상을 향한 리비도의 투자는 철회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대상이 사라지면서 만들어진 리비도 투자의 공백이 우리를 우리 삶의 고통스러운 공백과 대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민간요법에서 정신분석요법으로
우울은 일시적인 기분의 상태일 뿐, 병을 만들어 내는 독립적인 원인을 가진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것 자체만을 따로 떼어 고려해야 할 만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분을 겨냥한 치료법은 기분에 좌우되는 일시적인 치료법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신분석요법은 기분을 겨냥하지 않는다.
사실 기분을 치료하는 데는 다양한 요법들이 존재하는데, 육체를 직접 사용하는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그 내용이 무엇이건 치료 효과를 만들어 내는 원리는 간단하다. 그 원리는 둘 중 하나인데, 하나는 환자에게 새로운 대상을 붙여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의미를 공급해 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 사람에게 공격성을 표출할 수 없게 되면, 그 사람과 있었던 나쁜 일과 관련된 생각을 지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생각은 지울 수 있는데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생각은 억압할 수 있는데, 감정은 억압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그 감정이 다른 곳으로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관념에 붙어 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감정의 성질 자체가 다른 것으로 바뀔 수도 있다. 억압된 관념을 대신해, 감정이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경우 필요한 작업은, 의미 있는 어떤 대상과의 빠져 버린 고리를 복구해 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특정 대상과의 관계, 그리고 그러한 대상에 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고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정신분석이 겨냥하는 것이다. 그런 식의 고리 찾기를 통해 막혀 있던 감정의 통로나 리비도의 통로를 이어주는 것이다.
환자가 어떤 특정한 대상과의 특정한 관계 속에서 하나의 고리를 빠뜨렸다면, 그러한 고리가 포함된 관계의 양상이 갖는 나름대로의 구조가 있다. 이러한 특정 관계 형태의 내용은 환자의 무의식적인 환상을 통해 결정된다. 따라서 환자의 무의식적인 환상을 겨냥해 작업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신분석요법이 지향하는 목표다.
분석적인 증상
그렇다면 정신분석적인 의미에서의 증상이란 무엇인가? 어떤 병리적인 현상이 증상이 되려면, 그것은 일단 해석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해석 가능하다는 것은 그 현상 속에 그러한 증상을 만들어 낸 원인과 관련된 어떤 시니피앙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러한 시니피앙의 형태 뒤에는 그 형태에 의해 숨겨져 있는 그 무엇이 있을 수 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환자가 가지고 있던 어떤 욕망의 비밀이 들어 있다. 이렇듯 증상을 해석하는 것은 증상이 펼쳐 놓는 시니피앙들을 분해하여 그러한 욕망의 비밀을 구성해 내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우울은 증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니피앙을 통해 해석되지 않는다. 우울은 감정이다. 환자가 보이는 우울이라는 감정에는 어떤 시니피앙도 들어 있지 않다. 우울이란, 증상의 원인과 관련된 어떤 구성물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하나의 신호, 즉 지금 주체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보여 주는 기호일 뿐이다. 우울은 리비도가 빠져 있는 상태에 대한 신호다. 주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 주는 게이지일 뿐, 그것을 분석했을 때 그 원인에 대한 단서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증상의 추출
그렇다면 우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분석에서는, 우울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 분석적인 증상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우울이라는 기분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환자가 경험한 것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이력을 끄집어낸다. 분석적인 증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시니피앙을 추출해 내어 그것을 중심으로 분석이 진행되도록 한다.
전이의 치료적 효과
분석의 목표는 전이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분석은 환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으로부터 벗어나 그가 새로운 방식으로 욕망하고 새로운 방식을 사랑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작업이지, 일시적으로 나타난 어떤 감정 상태를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환상에 대한 애도, 환상 속에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애도의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우울감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
분석이라는 고행
증상은 그를 구성하는 요소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문제의 근원이 그가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는 방식, 그가 쾌락을 얻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에 있을 때, 문제의 해결은 결국 그러한 그만의 방식을 포기하는 데 있다.
당연히 환자로선 고통스러운 과정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우울한 과정일 수 있다. 그가 사랑했던 대상을 포기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가 사랑하는 방식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그가 탐닉하던 시니피앙들을 제거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신화들을 해체하는 작업인데, 당연히 리비도의 경제에 다시금 상실을 유발한다.
물론 이때 발생하는 우울은 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작업이기 때문에 치료해야 할 감정이 아니다. 마치 대상을 떠나보내는 애도 작업이 완수되어야 새로운 대상을 맞이할 수 있는 것처럼, 분석은 이러한 우울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잃어버린 대상을 찾아서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우울을 접근하는 것의 특징은, 현실적인 대상의 문제에서 그 대상이 환상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문제로 옮겨졌다는 데 있다. 즉, 우울의 핵심은 현실적인 대상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리비도의 대상 상실이란 현실적이건 심리적이건 리비도를 지속적으로 투자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현실적인 대상의 상실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애도라는 문제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떤 대상이 더 이상 리비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리비도를 투자한 대상이 투자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라깡은 이것을, 대상이 남근적인 가치를 상실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남근적인 가치란 내가 결여한 무엇을 보충해 줄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가치, 내가 욕망하는 대상으로서의 가치, 내가 얻고자 하는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의미한다.
어떤 대상이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내가 그 대상에게 남근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대상이 남근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그가 리비도적인 투자 대상으로서 남근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상에 온갖 광채들을 투사해서 마치 그 대상을 얻으면 나의 결여가 메워져서 내가 온전해질 것 같은 느낌을 갖제 된다.
이것은 하나의 공식이다. 공식이란 현실의 무수하고 다양한 경우들 가운데 공통적인 것을 추출해서 하나의 도식처럼 형식화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 남근이라는 단어가 표현할 수 있는 경우들은 무궁무진하다. 어떤 대상이 남근적인 가치를 갖게 되는 방식은 환상의 형태에 따라, 환상의 구조에 따라 다양하다.
내가 사랑하는 저 대상이 나의 이상, 내가 되었으면 하는 어떤 이상, 나보다 더 큰 타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내가 그렇게 되면 사랑받을 것 같은 어떤 이상형을 구현하게 되면, 여기엔 상상적인 관계 이상의 무엇이 발생할 수 있다. 요컨대 상징적인 관계 속에서도 나르시시즘이 만들어질 수 있다. 대상이 나와 수평적인 관계 속에 있는 타자가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 속에 있는 타자일 경우, 다시 말해 그 대상이 나의 자아이상을 대체한 경우가 집단적인 망상이나 최면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우울은 그 대상이 자아이상의 자리에서 튕겨져 나갈 때 발생할 수 있다. 대상이 자신을 지탱해 주는 자아이상에 걸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자아이상을 상실하게 되며, 그로 인해 우울감에 휩싸인다. 대상이 자아이상의 자리에서 튕겨져 나갈 때, 일차적으로는 불안이 발생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더 이상 그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실감과 우울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근이 되기
히스테리 환자에게는, 자신을 타자가 결여한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것이 바로 타자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이것을 공식화하면 ‘타자의 남근과의 동일시’라고 요약할 수 있다. 타자를 자신이 결여한 어떤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타자에게 결여된 대상으로 삼는 방식이다. 이것이 히스테리 환자가 타자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이들은 자신을 결핍된 상태로 남겨 놓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 상대가 나를 채워 주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스테리는 상대가 자신을 욕망하도록 만든다.
이런 경우에는 그 사랑이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 하더라도, 그 사랑에 일종의 고난이 엿보이더라도 이면에는 어떤 만족이 있다. 자신이 남근화되어 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나 우쭐함이 없지 않다. 겉으로 보이기엔 우울해 보일 수 있지만 그러한 우울은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다. 가면은 나르시시즘적인 만족을 동반한다. 이런 경우 진짜 우울함은 그가 남근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때 발생한다. 불가피하게 남근과의 동일시가 깨지는 경우, 즉 더 이상 그러한 남근의 자리에 위치하지 못하는 경우에 우울이 발생한다.
어떤 경우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가 더 이상 나를 욕망하지 않게 되거나, 자신이 상대의 환상에서 탈락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현실적을 상대가 사라지는 경우, 즉 자신이 그의 남근이 되어 주었던 상대가 사라지는 경우가 그런 경우일 것이다.
연인과 관계 맺는 방식이 히스테리적인 환자가 있었다. 남자친구는 환자에게 그리 만족스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무얼 해줘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지극정성으로 애정을 쏟아부어도 시큰둥하게 ‘얘가 왜 이래?’라는 식이었다.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떨어져 있게 되자 그녀는 곧바로 우울증에 빠졌다. 남자친구가 있을 때는 없어도 되는 대상이었는데, 그가 없으니 없어도 되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상대의 욕망이 만족되는 상황으로부터 발을 빼는 방식으로 자신을 남근화시켰는데, 상대가 사라져 버리니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똥이 되기
강박증자의 환상은 그 스스로를 타자의 대상, 그것도 폐기해 버린 대상으로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을 남근이 아니라 남근의 위치에서 추락한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환상이다. 그런데 강박증자에게 특이한 것은, 그렇게 스스로를 똥으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똥이 아니게 되는 길을 열어 놓는다는 점이다. 자신을 똥으로 위치시키는 방식이 오히려 그에게 남근적인 가치를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그에겐 똥이 곧 황금이다. 똥을 이상화하면서 그 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지나치게 폄하하고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추켜세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불평할 수 있지만, 이 역시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불평 뒤에는 환상에 의해 지탱되는 만족감이 있다. 그는 자신을 똥으로 만들어 줄 어떤 대상을 상실하게 되면 정말로 우울해진다.
우리는 왜 환상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은 오히려 환상을 지탱해 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현실을 보상하기 위해 환상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실을 이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애도는 현실의 수준이 아니라 환상의 수준에서 다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가 말한 대상 상실이 갖는 의미는 프로이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일 수 있다. 대상과 대상 상실이라는 개념을 확장하게 되면, 애도를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그것을 우울감이라는 문제틀 속에 위치시킬 수 있게 된다.
우울과 아버지의 이름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을 확장했을 때, 우울은 라깡적인 관점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용어로 대표될 수 있는 어떤 매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매커니즘은 무엇일까?
‘남근’이란 곧 내가 가지고 있지 않거나 타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상징을 말하며, ‘남근적인 의미효과’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결핍된 것의 자리를 만들어 놓는 효과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효과를 만들어 내는 시니피앙을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 혹은 부성적인 은유라고 부른다. 곧, 타자의 욕망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고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주조해 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시니피앙을 뜻한다.
빈자리를 일련의 대상들로 채울 수 있기 위해선 애초에 그 빈자리에 어떤 원초적인 대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빈자리를 채운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 그러한 원초적 대상을 대체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대상이 바로 남근이라고 가정되는 것인데, 이러한 가정은 아버지의 이름, 부성적인 은유에 의해 만들어진 효과다. 결국, 아버지의 이름의 효과는 어떤 대상이 남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그것이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욕망의 경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학문적인 용어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어려운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사실 매우 간단한 이야기다. ‘남근적인 의미효과’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욕망을 개입시킬 수 있게끔 ‘결여된 것’. ‘부족한 것’의 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가령, 다른 사람을 보니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나도 더 가지고 싶다든가,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한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든가 혹은 다른 사람이 빼앗을까 봐 자신이 먼저 가지고 있지 않은 자처럼 행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환상’은 각자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이런 욕망이 작동하도록 규정하는 심리적 현실이다. 이러한 환상이 죽어 있을 때 우울이 발생한다면, 우울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욕망이 소멸할 때 발생하는 감정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우울한 사람들에게 욕망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울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신경증적인 우울이 아버지의 이름과 남근적인 의미효과에 의해 설정된 욕망의 경제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정이라면, 이는 그러한 우울이 상징적인 경제 속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상징적인 경제란, 상실된 대상이 충분히 대체 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마치 애도 작업이 종결될 때처럼 그런 우울한 감정이 소산됨을 가리킨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애도 작업이 불가능한 멜랑꼴리에서는 그런 식의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라깡이 멜랑꼴리를 정신병 속에 위치시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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